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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공과09(150308)

2015.02.27 09:59

서승철 조회 수:126

9: 예수님을 찬양해요

 

성서본문: 마가복음 11:1-11

공과주제: 우리를 위해 죽으신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하자

 

1. 교사들을 위한 본문 안내

예수님의 공새애 마지막 일주일의 시작은 아주 특별하고도 상징적인 예수님의 한 행동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을 방문하곤 했지만, 이번만큼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예수님도 여느 평범한 순례자들과 같이 도보로 입성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예수님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향하셨습니다.

언뜻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 독특한 행렬은 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대단하게 이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 모습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의 행렬은 잠깐 반짝이다 꺼지고 말았습니다. 11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날이 저물어 예수님이 성전에서 나왔을때 그들은 예수님 곁에 없었습니다. 낮에 있었던 환호의 열기도 식은지 오래되었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찾아 봐도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동안에 그들의 모습은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 기간 동안에 많은 사람들과 충돌했으며 비난과 논쟁의 대상이되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환호가 아니라 의혹과 미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성경에 예수님을 보기 위해 많은 무리가 다시 모였다고 기록된 곳에서 사람들은 십자가형을 내려 달라고 열광하였습니다.

여하튼 나귀를 타고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30대 청년이 나귀 새끼를 타고 뒤뚱뒤뚱 걸어가는 모습을 말입니다. 거기에서는 어떤 위엄이나 존귀도 발결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주둔하던 로마의 군인이나 정치가들도 이 일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하필 나귀냐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특별해 보이기를 원했다면 나귀가 아니라 을 탔어야 했을 것입니다. 자고로 예루살렘을 차지했던 모든 위인들은 군대를 거느린채 말을 타고 성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BC 160년 경, 마카비가 강력한 헬라제국과 싸우고 예루살렘을 다시 되찾고 왕조를 세웠을 때, 그는 말을 타고 성에 들어왔습니다. AD 70년경 기나긴 유대전쟁의 종지부를 찍고 예루살렘을 정복한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개선장군으로 이 성에 들어올 때에도 말을 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굳이, 하필이면 제자들에게 나귀를 준비하도록 지시하셨던 것일까요?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에 본문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21:5).” 표면적으로만 보면 마태의 이 해석은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왕의 자격으로 성예루살렘에 들어가셨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지만, 그는 자기를 과시하는 세상의 왕과는 달리 겸손한 왕이었기 때문에 나귀의 새끼를 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데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태가 인용한 구약성경 스가랴 9:9의 말씀을 보면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 예언의 말씀은 장차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실 왕이 오실 것이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행동은 단순히 겸손을 보이려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언한 그 메시아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왕일까요?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예수님은 말을 타고 성에 들어가는 세상의 왕과는 전혀 다른 왕이라는 의미에서 나귀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은 말과 군대를 가지고 전쟁에 나가 다른 나라를 정복함으로써 힘으로 다스립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이런 왕의 모습을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능력과 힘으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독립시켜주고 다윗의 옛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주기를 바랐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력으로 뒷받침되는 평화의 시대를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꿈꾸는 그런 시대가 온다고 해도 진정한 평화는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근본적으로 속박하고 있는 어둠은 정치적으로 자유를 보장 받지 못해서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해서도 아니고 군사적으로 힘이 없어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짜 인간을 자유하지 못하게 하고 가난하게 하고 약하게 하는 것은 죄와 죽음입니다. 모두가 바로 이 죄의 상태에 빠져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 무엇으로도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죄와 죽음과의 마지막 전투를 위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칼과 군대를 동원한 세상적인 전투가 아닙니다. 홀로 우리의 죄와 죽음을 끌어안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임을 당하시는 하나님의 전투입니다. 그가 다시 살아났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생명 곧 평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2. 공과를 위한 안내

·    ** 위의 본문 안내에서는 주로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것에 관해서 설명하였지만, 아이들에게 실제로 가르칠 공과의 내용으로는 교재에 나와 있는 예수님을 찬양해요라는 주제가 더 적절할 듯 싶습니다.

·     ** 물론 설명한 것처럼 본문의 예수님을 환영한 무리들에게서 온전한 찬양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비록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길가에 겉옷을 깔고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했어도 그 중에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자신들의 기대와 욕심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     ** 그러므로 온전한 찬양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사순절 기간에 무엇보다 예수님이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지 그리고 왜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타셨는지, 그 의미를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진심으로 찬양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