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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공과17(150517)

2015.05.05 13:11

서승철 조회 수:144

제17과: 첫 번째 오순절

 

성서본문: 사도행전 2:1-13, 38-41

공과주제: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와 교훈


오순절은 언제일까요?

오순절(Pentecoste)은 “다섯, 열흘 , 마디 로서 유월절 이튿날부터 계산해서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 날은 구약의 절기로는 칠칠절 혹은 맥추절이라고도 부릅니다. 봄 축제의 마지막 절기인 오순절이 칠칠절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오순절이 초실절(곡식의 첫 익은 열매를 드리는 절기)로부터 7주를 지나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는 오늘 우리의 시간개념으로는 6월 초순경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봄이라기보다는 여름이 막 시작되는 무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이 시기에 보리수확을 마칠  즈음이었기때문에 이 날을 맥추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에게 오순절은 더이상 구약의 율법에 기초한 절기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오순절은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공동체 위에 임하신 날입니다.

 

유월절에서 오순절로!

유대인들에는 율법에 따라 3대 절기를 지켰습니다.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이 중에서도 종교적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는 유월절(Passover)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을 역사 속에서 실제로 경험한 기념의 날이 바로 유월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바로의 폭력과 압제 그리고 착취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을 크신 능력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구원이 이루어지기 하루 전날 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의 상징적인 의식으로서 유월절을 제정하셨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들을 고통에서 건지신 것처럼 다시 한번 그들을 구원하실 미래의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여전히!, 지금까지도! 고대하는 그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경험했습니다. 유월절의 사건, 즉 죄 없는 한 어린양의 희생을 통한 대속이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이미 보편적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는 유월절이 아닌 오순절을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구원의 실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체험적으로 경험된 사건이 바로 오순절이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은 단지 구원에 관한 상징성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오순절은 그 상징의 구체화, 실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교회의 시작!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되어 있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 대한 해석이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기울면서 소위 ‘성령세례’라는 말이 생겨났고, 이 말은 성령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이해를 상당부분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성령에 대한 전체적이고 균형적이며 또한 본질적인 의미는 사라지고 부분적이고 불균형적이며 또한 비본질적 의미로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 사건의 본질을 방언이라는 한 종교적 현상의 차원에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방언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지 못한다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이런 단순한 논리적 도식만이 강하게 박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제는 방언이라는 벽을 세워서 아무나 누리지 못하게 막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지적한 바와 같이 방언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의 하나일 뿐입니다. 은사는 개인과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필효한 것일뿐 그 자체로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성경의 보다 넓은 맥락에서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체 삶의 지평에서 다시 이해해야 합니다. 성령은 왜 우리에게 오신 것일까요? 성령이 오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타난 구원의 의미와 능력이 우리 자신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성령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는 있어도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궁극적 생명을 우리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공동체 위에! 안에! 그리고 가운데! 임하였습니다. 구원과 생명은 이제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경험됩니다.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경험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교회의 시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지상의 공동체의 출범, 그것이 바로 성령이 임하자 나타난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공동체,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따라서 만일 교회가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인간적인 제도에 의해서 유지되려하고 외형적 성장만을 추구한다면 이미 본질 밖으로 벗어난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방언사건의 의미

여하튼, 사도행전 2장의 기록에 따르면 분명 그날 오순절에는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명의 신도들에게 방언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사실 그 외의 다른 특별한 기록을 찾아볼수도 없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만 방언에 집착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날에 있었던 방언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을 피해갈 방법이 없습니다.

짧게 핵심만 말하자면, 중요한 구절은 7-8절과 11절 후반부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 우리가 다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우리는 흔히 방언하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아니 이상한(!)언어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기록되 방언의 의미는 정확히 이 모든 것에 반대입니다. 여기에서의 방언이란 말 그대로 다른 지방(혹은 나라)의 언어를 가리킵니다. 경상도 방언, 전라도 방언 할때 그 방언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오순절을 맞이해서 예루살렘에 모여든 세계 각지의 흩어진 유대인들이 놀란 까닭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속한 여러 땅의 언어로 알아듣는 말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오늘날의 방언은 못알아듣게 하려고 하는 비밀언어인 반면에 그때의 방언은 똑똑히 알아들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의 방언은 기도의 성경이라기보다는 예언의 성경에 가깝습니다.

그러면 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의 큰 일”이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결론만 빨리 말씀드리자면, 여기에서 하나님의 큰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땅에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구원이 널리 퍼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신도들이 말한 방언의 내용은 “너희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것이다!” 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사도행전을 쭉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2장만보아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그 결과 이 날에 모든 각지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러 사람들이 초대 교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공과를 위한 교훈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어요.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우리의 곁에는 없지만 우리와 늘 항상 함께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원자 곧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믿는다면,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고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님과 함께입니다. 아니,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주세요.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의 욕심을 가지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지만,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하게 하십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때문에 혹은 우리의 연약함때문에 할 수 없는 일들을 성령님은 생각나게 하시고 또 할 수 있도록 우리 곁에서 돕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서 먼저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나아가서는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나타나도록 돕습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는 교회가 되게 해주세요.

교회는 단지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제도도 아닙니다. 물론 교회는 건물도 있고 제도도 있고 사람도 있지만,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 아닙니다. 중심은 성령님입니다. 교회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령을 통해서 유지되고 발전합니다. 교회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자신의 노력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머무시고 또 우리를 도와 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가 성령님과 함께 하는 교회가 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