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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공과20(150607)

2015.05.29 13:24

서승철 조회 수:85

푸른공과20: 위대한 용서

  

공과 안내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위대한 용서라는 제목을 가진 이번 공과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죄사함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미 이 주제에 관한 공과를 여러 번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안내에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공과 본문으로 채택된 두 본문 중 하나인 마태복음 9:1-8에 대한 성서학적 접근을 시도할 생각입니다. 교재의 내용을 충실히 따라서 공과를 준비하셔도 좋고 이 안내를 참고해서 공과를 준비하셔도 좋겠습니다.

 

v  성서본문: 마태복음 9:1-8

v  공과주제: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다.


중풍병자의 치유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이 본문은 공관복음서 모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9, 마가복음 2, 누가복음 5. 그만큼 이 이야기는 잘 알려진 이야기일뿐만아니라 신앙적 의미에 있어서도 중요한 이야기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중풍병자를 도와주는 친구들의 믿음에 초점을 맞춥니다. 마침 본문의 2절에도 이런 표현이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좀 더 깊게 생각을 해봅시다. 환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의 믿음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단지 친구들이 환자를 데리고 왔다고만 기록되어 있지만 마가와 누가의 기록은 조금 더 자세합니다. 먼저 마가복음 2 4절입니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다음은 누가복음 5 19절입니다.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상황은 이렇습니다. 지금 많은 무리라고 표현될 만큼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데리고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붕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지붕을 뜯어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은 건조한 지역이어서 평범한 집들의 지붕은 쉽게 걷어 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해도 상식적으로 지붕을 뜯어내는 행위를 일반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그들은 이런 무례까지도 감수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믿음이 얼마나 큰 믿음입니까? 하지만 본문의 진짜 관심은 이 친구들의 믿음이 얼마나 크고 좋은가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믿음은 무엇에 대한 것이었는가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실제로 갈등과 대립을 하고 있는 대상들은 누구일까요? 중풍병자와 친구들이 아니라 어떤 서기관들과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갈등은 왜 일어난 것일까요?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2,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말이 아니, 어떻게 그럴수각?’ 이렇게 충격으로 와닿으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어떤 거리낌도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기관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서기관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율법을 배우고 기록하고 가르치는 학자들입니다. 율법에 관해서는 공식적으로 최고의 전문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율법에 대해서만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있어서도 그들은 최고의 권위자들입니다. 그들에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이 단순한 한 마디의 말이 큰 가시처럼 들렸습니다. 3,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예수님이 지금 신성모독의 불법을 행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의로워도 그것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모두 어느 정도 더 의롭거나 어느 정도 더 악합니다. 결국에 인간은 모두 누구를 용서할 수 있을 만큼의 완전한 의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간은 모두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이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한 의를 절대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인간의 죄를 사하겠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교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어떤 서기관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물으셨습니다. “어는 것이 쉽겠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둘 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예수님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정말 무엇이 더 쉬운 일일까요?

일차원적으로 생각하자면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이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하면 반드시 행위의 결과가 나타나야 되기 때문입니다. 진짜로 중풍병자가 일어나서 걸어가야 합니다. 누구라도 이런말을 쉽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말은 네 죄가 사해졌다라는 말 보다는 상대적으로 쉬운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간혹 인간의 손을 통해서도 기적은 일어날 수 있지만 죄를 사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 말은 당장 눈으로 보이는 어떤 변화가 나타자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쩄든간에 둘 다 어려운 말인 것은 확실합니다. 아마 아무도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명쾌하게 대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서기관들조차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네 죄가 사해졌다는 선포를 앞서 하셨고 이번에는 두 번째 말씀까지 무리 앞에 하셨습니다. “중풍병자야 일어나 걸어가라.” 그러자 정말로 그가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기적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환자가 일어나 걷게 된 이 일은 단지 육체적 질병이 치료된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으로 그의 죄가 사해진 것입니다. 적어도 그 자리에 있던 서기관들에게는 바로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관점에서 볼 때, 중풍병자의 병은 그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네 죄가 사해졌다고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를 일어나 걷게까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진짜 메시지는 본문 6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진짜로 중요한 것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크냐에 있지 않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길래?’라는 질문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실까요?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낫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능력을 가진 분임이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탁월한 능력 정도가 아니라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은 이미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의 죄를 사하셨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마지막까지 그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다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용서의 사건은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켰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나타난 용서의 능력은 그로 하여금 일어나 걷게 하였습니다. 그를 전혀 새롭게 변화시켰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로 말미암아 죄 때문에 일어설 수 없었던 우리의 영혼이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되고 단절되었던 관계가 다시 연결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우리의 존재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