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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공과15(150419)

2015.04.17 08:09

서승철 조회 수:151

18과 친구와 갈등이 생길 때

 

v  성서본문: 사도행전 6:1-6 / 마태복음 5:23-24

v  공과주제: 친구와 갈등이 생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1.     친구와 갈등이 생길까?

우리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다르냐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릅니다. 얼굴 생김새, 말투, 걸음 걸이, 취향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은 사람들 뒤에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은 밖에서 나가서 뭐라도 하면서 움직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음식 먹을 때 이것 저것 섞어서 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또 어떤 사람은 하나씩 따로 따로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하나부터 다르다보니 저마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또 다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인데, 이렇게 저마다 옳고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다보면 나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게 당연합니다. ‘쟤는 왜 저런 식으로 말해?, 쟤는 왜 저런 식으로 행동해?, 재는 왜 저렇게 나서기를 좋아해?, 재는 왜 아무것도 안하려고 해?, 재는? 재는? … 재는 또 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다보면, 이런 저런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말하려고 합니다. 저는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것을 싫어합니다. 굳이 밥을 먹을 때면, 국물 한 숟가락 떠 먹고 밥 한술 뜨고, 그런 식으로 먹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라면에 밥을 아예 말아서 먹습니다. 저는 밥알이 불어서 국물이 탁해지는게 진짜 싫은데, 그 사람들은 그게 별미라고 말합니다. 제 기준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더 참기 힘든건, 같이 라면을 먹을 때 묻지도 않고 밥을 말아버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면발을 다 먹고 마지막 국물을 순수한 상태에서 쉬원하게 마시려는 참인데, 갑자기 누군가 거기에 밥을 빠뜨려버리면 마음에 상처가 됩니다. 이런 걸로 싫은 소리 하면 속 좁은 사람될 것 같고, 말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상처는 더 커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이랑은 다시는 라면을 같이 먹고 싶지가 않습니다. ‘라면에 밥 말아 먹고 싶으면 컵라면이나 먹으라지화가납니다.

 

 2.     구와 갈등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첫째, 인정하기

갈등을 피하고 싶어서 나와 비슷한 사람끼리만 어울리려하는 것은 아주 피곤한 일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만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는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찾아다니는 눈치가 아니라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과도 공존할 수 있는 관계의 탄력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고무줄 같은 탄력을 배울 수 있을까요?

일단은 가장 쉬운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일에 도전하면 재미도 없고 효율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정하기,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친구와 갈등이 생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 나에게 친구와 갈등이 생기지?’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스트레스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갈등이 생기면, 생겼나보다 하고 그냥 넘기면 됩니다. 자꾸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것 자체를 고민하게 되면 예민하게 되고 갈등을 자꾸만 피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면 결국 갈등만 피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죠. 나와 친구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갈등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갈등이 생겨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게 됩니다. 그러면 갈등이 친숙(?)하게 되고 나중에는 잘 대처하게 되는 법입니다. 

둘째,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하기

알고 보면 갈등의 발화의 대부분이 모든 것을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손바닥도 부딪혀야 소리가 난다고 둘 중 하나가 자기의 고집을 조금 내려놓으면 갈등의 불씨는 그만큼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일단 화가나면 차분히 상황을 이성적으로 살피고 거기서 한 발 더 나가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어렵다고해서 그런 시도조차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어렵지만 자주 자주 반복해서 노력하다보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면 나중엔 자연스러워집니다. 이런 연습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해가 절대로 안 되도, 속으로라도 그래, 그렇수도 있겠지?’라고 생각해보기! 화가 나도 딱 3초만 참기! 별거 아닌것 같아도 의외로 큰 도움이 됩니다. 화가나는 대로, 갈등이 번지는 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방치하는 것보다는 훨씬 도움이 됩니다.   

셋째, 먼저 용서하기, 먼저 화해하기, 먼저 다가서기

알고보면 우리는 모두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다가와주기를, 상대방이 먼저 사과해주기를, 상대방이 먼저 용서를 구하기를 말입니다. 이것은 사실 좋은 소식입니다. 나 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기다리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조금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지만 내가 먼저 다가서면 상대방은 그것에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내가 먼저 화해의 손을 건내면 그는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먼저 용서하면 그는 더 미안해 할 것입니다.

갈등을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관계는 썩어갑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오해는 자꾸 커기고 없던 갈등까지 생기게 됩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야 한다면, 가능하면 빨리 용기를 내는 것이 좋습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그게 가장 쉽기도 합니다. 계속 미루기만 하면 나중에는 어지간한 용기로도 극복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니 생각은 짧게 행동은 빠르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3.     마태복음 5:23-24의 교훈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파격적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가 형제와 맺는 관계와 하나님과 맺는 관계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우선인가하는 질문은 여기에서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다만, 형제와의 관계가 깨어지고 갈등의 상태에 있으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옳습니다. 나와 친구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그 갈등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도 분명히 좋지 않은 영향을 줍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예배드리는 것이 힘겨워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친구들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7: 마라나타

v  성서본문: 사도행전 1:9-11, 데살로니가전서 5:1-2, 5-8, 데살로니가후서 1:7-12

v  공과주제: 예수님의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

1.     다시오신다는 약속

두 가지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이루어진 약속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둘 중에 어떤 것이 우리에게 더욱 중요할까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장차 이루어질 약속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들의 중심은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주실 것이라는 약속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랜 시간동안 기다렸습니다. 이 땅의 불의와 고통의 현실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현실 즉, 정의와 평화의 현실로 변화될 것을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메시아가 오기를 간절히 고대했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죄의 굴레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약속이 있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겠다는 재림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약속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기뻐하지 않거나 또는 싫어합니다. 그들이 재림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처럼 생각됩니다. 그 약속이 있은지도 이미 2천년이나 지났습니다. 재림의 약속은 마치 잊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이런 생각은 단지 인간적인 생각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후서 3:9).”

사람들이 재림을 기뻐하지 않거나 또는 싫어하는 이유는 재림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종말에 일어날 심판의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은 희망과 기쁨대신에 오히려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그러나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심판은 재림을 통해 마침내 완성될 하나님의 구원의 반대쪽 모습일 뿐입니다. 재림의 본질은 오히려 구원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재림을 잘못 이해하는 원인 중에 하나는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재림에 관하여 혹은 종말에 관하여 바른 성경적 이해를 가르치는 것을 소흘히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종말의 본질이 무엇인지 재대로 배워야 합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재림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히려 사모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베드로후서 3:12).”

  

2.     재림의 이미지: “구름 타고 오시리라

재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마치 만화에서 보았던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나타나시는 모습입니다.

구름 타고 오시리라!” 이것은 복음서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님의 재림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입니다. 도대체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기 위해서 항상 하늘을 바라보고 구름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살펴야 하는 것일까요? 얼른 이런 의문도 떠오릅니다. 만일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시면 지구 반대편의 사람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지? 방송으로 중개가 되는 것인가? 아니, 예수님이 내가 서 있는 지구 반대편으로 구름을 타고 오시면 나는 어떻게 하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런 의문들이 마구 생겨납니다.

일단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구가 둥글다는 누구나 다 아는 오늘날의 상식을 인류가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백년 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약 2천 년 전에 기록된 복음서와 요한계시록이 이 사실을 알았을리가 없습니다. 당시의 세계관에서는 지구는, 아니 우주는 크게 3층의 구조로 이루어져있었습니다. 인간 세상이 있는 땅, 그리고 그 아래인 스올 혹은 음부, 그리고 땅 위에 하나님이 계신 하늘. 또 사람들은 땅이 평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땅 끝에 가면 낭떠러지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구름타고 오신다는 말씀은 이런 세계관의 기초 위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구름이라는 문자가 아니라 그 상징성입니다. 구름은 하늘을 땅으로부터 가리는 역할을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볼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은 재림이 하늘의 계시 사건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사건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이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평평한 땅의 세계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게 되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재림은 누구에게는 계시되고 또 누구에게는 은폐되는 그런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모두에게 부인할 수 없는 개방된 사건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세상적인 방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방식으로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시간과 공관을 향하여 완전히 개방된 사건입니다.

  

3. 마라나타, 재림을 준비하는 삶

마라나타는 아람어의 헬라식 발음으로써,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간절히 사모하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신앙을 표현한 기도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2:20에 그 기도문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약속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이루어졌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새로운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해야 할까요?

사모하라.” 첫 번째 재림을 준비하는 삶의 자세는 사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완전히 완성되는 때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 구원이 마침내 완성될 것입니다. 악이 심판을 받고 의가 완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날은 승리의 날입니다. 기쁨의 날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날을 혼인잔치로 비유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참으로 맞는 설명입니다. 

깨어 있으라.” 재림을 준비하는 두 번재 자세는 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어느 때에 재림이 이루어질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의 때는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잉태한 여인이 갑작스럽게 해산의 때를 만나듯이 그렇게 주님은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깨어있지 못한다면 그 날에 우리는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일 깨어 기다리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된다면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2, 5-8의 말씀은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아주 잘 말해줍니다.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