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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공과12(150329)

2015.03.20 11:50

서승철 조회 수:124

3: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

성서본문: 시편 139:1-16

공과주제: 하나님 안에서 나의 자존감 찾기


질문합니다.

1) 세상이 사람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2) 그러면,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때 나는 얼마나 가치있는 사람일까요?

3)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생각해봅시다.

1) 세상이 사람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돈이 아주 많은 사람, 공부를 아주 잘 하는 사람, 얼굴이 정말 잘 생긴 사람, 사회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 돈이 없고 없고, 공부를 잘 못하고, 얼굴이 못 생기고, 사회적으로도 실패한 사람들은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세상적인 가치 기준들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무언가 조건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 받기 위해서는 무언가 조건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부분 우리의 겉을 화려하게 꾸며주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일단 마치 조각 같거나 혹은 인형 같은 외모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외모를 더욱 빛나게 해 줄 멋진 장식품들이 필요합니다. 세련된 헤어스타일, 최신 유행의 패션, 명품 시계나 가방 그리고 고급 스포츠 카. 사랑, 나눔, 희생, 섬김과 같은 내면적 가치들은 여기에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런 가치들을 소중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외면적인 것들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오늘 이 시대가 소비중심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돈이 있는데, 돈만 있으면 우리는 무엇이든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삶에 필요한 물건들만 아니라 행복이나 사랑과 같은 보이지 않는 가치들까지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목숨을 겁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도 지식 자체를 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돈을 잘 버는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입니다. 성공해야 하는 이유도 결국 같습니다. 그렇게 돈을 많이 벌고나면 이제부터 자신의 겉을 화려하게 꾸밀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가치 있다고 말하고 부러워합니다. 

2) 그러면,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때 나는 얼마나 가치있는 사람일까요?

세상이 정한 기준에 따르면 우리들 대부분은 가치 없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학교에 다니고 있는 친구들에게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는지 혹은 사회적으로 얼마나 성공을 했는지를 따지기는 어렵겠지만, 단지 외모나 학교 성적만을 가지고도 많은 친구들이 절망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외모와 관련된 컴플렉스는 깊이로는 아주 디테일하고 길이로는 아주 무한합니다. 얼굴 크기, 목 길이, 허리 둘레, 눈썹 모양, 머리카락 굵기, 허벅지 굵기, 턱 선 모양, 코대의 높이, 뒷 통수의 모양 아주 방대합니다. 이 모든 영역에 만점을 받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친구들은 광고에 나오는 말도 안 되는 몇몇 연애인들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고통을 받습니다. 또 성적은 단지 자신의 학업성과를 확인하는 척도일 뿐인데도, 많은 친구들은 고작 1에서 100까지의 숫자 안에서 자기의 미래와 운명을 발견이나 한 것처럼 확신하거나 절망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런 기준들에 의해서 평가를 받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로 이런 것들이 우리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3)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사무엘상 16:7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들이 바라 보는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겉을 보고 판단하지만 사람의 속을 지으신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십니다. 키가 크고 아무리 세상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 거짓과 미움이 있고 하나님 사랑함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지 않습니다. 반면에 키가 작고 세상적으로는 조금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 진실함이 있고 하나님 사랑함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우선 순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자기의 겉을 얼마나 화려하게 꾸밀 것인가를 고민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안을 얼마나 아름답게 가꿀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의 창조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라는 존재 자체가 다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최고의 가치이시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가치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최고의 가치로,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1:27).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존재 자체만으로 최고의 가치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돈이나 외모나 성적이나 지식이나 성공과 같은 껍데기들은 단지 상대적인 조건들일 뿐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나의 가치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완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의 가치를 증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서 그의 아들마저 십자가에 내어 주셨는데,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았다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이겠습니까?

다윗은 오늘 세상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기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자기 안에 이미 주어져 있는 소중한 가치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존재가 그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소중한 일을 위해서 자신이 꼭 필요한 사람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모든 것들이 신비하고 아름답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적용해봅시다.

삭개오를 생각해 봅시다. 삭개오는 열등감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키가 작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벌고 출세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은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직 목표를 달성하는 것만이 중요했습니다. 그는 세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많이 습니다. 때로 그는 정직하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때로 속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상관없었습니다. 그는 덕분에 부자가 될 수 있었고 후에는 세리장까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세상적으로 성공하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죄인이라고 욕하면서 멀리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성공을 축하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소외와 분리가 삭개오를 외로움 속에 몰아 넣었습니다. 그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삭개오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는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삭개오야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습니다. 그는 이름처럼 깨끗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는 아무도 그와 함께 있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어떤 조건때문에 그를 미워하거나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자금까지의 자신의 삶이 무언가 잘 못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자신이 그 동안 모아 온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겉을 꾸밀 필요가 없었습니다. 삭개오라는 그 자신이 이미 소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1) 내면적 가치들을 가꾸기: 예수님은 겉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율법의 정신은 잃어버리고 형식만 따르는 율법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겉이 아니라 속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겉이 화려해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보다 안이 온전해지기 위해서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22-23에서 이런 내면적 가치들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재.

2) 자기를 사랑하기(자존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조건때문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오직 그의 사랑 자체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때문에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또 사랑때문에 우리를 위해 아들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내가 비록 부족하고 연약해도, 남들에게 있는 멋진 조건들이 내게 없을 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이미 소중한 사람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2: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성서본문: 요한복음 1:1-5, 10-14, 빌립보서 2:6-7

공과주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1. 안내: 몇 가지 신학적 지식들

** 초기 기독교의 그리스도론: 초기 기독교의 신학은 주로 “예수가 누구인가?”의 질문에 답하는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이루졌는데, 특히 예수님의 인성보다는 신성의 의미를 확인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이 얼마만큼 높아질 수 있으며, 또 그 신성의 기원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를 알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관심은 신약성경의 복음서에도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 공동체는 아주 초기부터 이미 예수님을 ‘주’, 곧 하나님으로 고백하면서 예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렸습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기독교와 유대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주후 1세기 말에는 갈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교회는 이미 어떤 신학적 연구나 논의의 과정을 거치기 이전부터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4복음서 안에서 예수님에 대한 신성의 의미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고양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AD 70년경에 기록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처음부터 청년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마가는 특히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 올 때, 예수님에게 하늘로부터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였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신성의 의미가 그의 공생애 사역의 시작과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반면, AD 80년경, 서로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서로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몇몇 차이들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두 복음서 모두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신성의 기원은 그의 탄생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잉태라는 사실에서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의 신성의 의미가 마가의 성령의 임재보다 훨씬 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주어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AD 90년경에 기록된 요한복음에서 가장 높이 올려진 예수님의 신성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신성의 역사적 기원은 그의 세례나 탄생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서 ‘태초’부터 발견됩니다. 태초란 시간 이전 혹은 시간의 근원적 출발점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예수님의 신성이 시간적 개념을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가서 그 이상의 근원적 출발점을 찾을 수 없을만큼 원래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온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 자체가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 모든 내용을 한 마디로 압축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물론 이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예수님의 신성의 의미를 최대한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노력이 예수님의 인성의 의미를 버리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에 관하여서는 그들은 이미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시며 십자가에 달려서 죽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제자들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 로고스와 성육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요한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론을 가리켜서 ‘성육신 사상’이라고 부릅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우리에게는 사실 생소하지만, 요한이 여기에서 사용한 ‘말씀’이란 표현은 원래 스토아주의에서 기원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세계관을 반영한 개념입니다. 한글 번역이 아니라 원어인 헬라어로 보자면, 여기에서의 말씀은 곧 ‘로고스’(Logos)입니다. 교회를 다니다 보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단어인데, 사실 로고스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고대 그리스 시대를 살지 않고 오늘의 현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로고스의 기본 개념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요한이 말한 로고스 성육신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고스란 한 마디로 세계의 근원적 생성의 원리입니다.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 사회를 포함한 이 세계에는 어떤 규칙과 질서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 세계에는 체계성(논리)이 숨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체계성을 로고스라고 부르고, 이 로고스로부터 세계가 생성되고 형성되며 규정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스토아 학파 사람들은 로고스가 세계의 모든 사물 속에 어느 정도씩 스며들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서 이 로고스는 신적인 요소를 가진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스토아 학파 사람들은 모든 사물들 안에서 신성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범신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기도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의 로고스 사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설명하는 개념적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요한은 당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던 헬라적 세계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이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근원적이며 보이지 않으면서 세계를 생성하던 로고스가 이제는 보이고 경험되는 실체적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창조의 근원이신 신이 창조의 세계 안에서 피조물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헬라의 로고스 사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자 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요한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의 진리를 헬라 세계 안에서 이해가능한 언어로 설명하기 위해서 로고스라는 개념을 차용한 것이지, 진리를 철학이나 언어로 치환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헬라의 로고스 사상과 요한의 로고스-그리스도론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헬라의 로고스는 이 세계의 물질적 사물들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로고스가 물질을 생성할 수는 있어도 물질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세계를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물질을 생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질과 연결될 수 있으며 결국 마지막에는 물질 자체로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2. 적용: 공과의 교훈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명제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How?”가 아니라, “Why?”입니다. 사실 그 어떤 논리적 설명으로도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이 되었는지, 그 과정을 완벽하게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어찌되었던 간에, 하나님은 ‘이미’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제 ‘왜’를 물을 차례입니다.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도 요한은 요일 4:16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이에 대한 답은 바울이 로마서 5:8에서 하였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만일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면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단지 초월적인 신이기만 했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는 있어도 사랑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위해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지라도 인간이 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추상적으로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2) 우리의 죄를 사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인간이 가진 모든 아픔과 슬픔  그리고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끌어안기 위해서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에 빠져서 살아가는 우리의 죄인의 모습까지도 끌어 안으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죽음의 실존까지도 끌어 안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끌어 안음은 단지 우리를 동정하고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소멸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인간이 되심으로 인간의 모든 실존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셨습니다. 어떻게? 바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마땅한 죄의 심판과 죽음의 운명을 그가 대신 받으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놀라운 변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믿습니다. 

3) 온전한 인간의 삶을 보여 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세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참된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가진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철저히 인간의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했습니다. 어떤한 상황에서도, 심지어 십자가를 지기 바로 전에도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미움을 받는 사람들, 예수님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오히려 버림 받고 소외된 자들을 더 가까이에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셨고, 제자들을 선택할 때에도 기도하셨고, 큰 기적을 일으키신 다음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래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되 말로만 아니라 몸으로 사랑하고, 항상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른 인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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